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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57

창 가에서 창(窓) 가에서 한 향순 햇볕이 따사로운 아침이다. 정신없이 북새통을 치르고 남편과 아이들이 집을 나간 후, 잠시 쌓인 일거리를 접어둔 채 커피를 끓여 거실 창 앞으로 나온다. 늘 그렇듯 선 채로 창 밖의 모습을 꼼꼼히 둘러보며 천천히 차를 마신다. 왼쪽으로는 고압선 철탑 밑으로 줄줄이 늘어선 .. 2009. 7. 15.
희망을 안고 오릅니다. 희망을 안고 오릅니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덥고 긴 것 같다. 아직도 한낮에는 곡식과 과일을 여물게 하려고 햇볕이 따갑지만 얼마 안 있으면 더위도 수그러들고 물기가 걷히면서 나뭇잎들은 싱싱함을 잃을 것이다. 오후 늦게 한낮의 열기를 피해 산으로 오르는 숲 속으로 발길을 옮긴다. 어젯밤 내린 .. 2009. 7. 15.
다림질 다 림 질 한 향 순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다림질을 한다. 바람 한 점 없이 후덥지근한 날씨에 다리미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로 등허리는 땀으로 흥건하다. 기승을 부리는 더위를 조금이라도 피해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산과 바다를 찾아 연일 도시를 빠져 나가고 있다. 예전 같으면 나도 마음이.. 2009. 7. 15.
만남의 인연 만남의 인연 한 향 순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어떤 연예인이 어린 시절의 은사님을 찾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찡해왔다. 그 프로는 유명한 연예인이나 성공한 스타들이 어릴 적에 짝사랑하던 동창이나 보고 싶은 친구를 찾아내어 재회하는 흥미위주의 프로였다. 그러나 그 날의 주인공은 .. 2009. 7. 15.
나목의 의미 나목(裸木)의 의미 한 향 순 그곳으로 가는 길은 하얗게 눈을 뒤집어 쓴 나무들과 그것을 품은 설산(雪山)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었다. 표지판을 따라 꼬불꼬불한 고개를 넘다보니, 동양화 같은 산자락에 포근히 안긴 하얀 건물이 나타났다. 사방은 병풍처럼 산으로 둘러져 있고 아늑한 분지 같은 곳에 .. 2009. 7. 15.
생명의 노래 생명의 노래 한 향 순 우편함에 묵직하게 꽂혀있는 책을 발견했다. 정기구독을 하는 잡지이거나, 책을 낸 문우들의 증정본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심히 꺼내보니 낯익은 친구의 필체가 반갑다. 포장을 뜯으니 깨알처럼 쓴 정겨운 글이 나온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게 덧없습니다. 꽃이 피고 지는 것도 .. 2009. 7. 15.
익숙한 몸짓들과 이별을 고하며 익숙한 몸짓들과 이별을 고하며 아침에 눈을 뜨면 혹시나 하며 이불을 젖히고 다리부터 살핀다. 예전처럼 벌떡 일어나던 건강한 다리이기를 간절히 기대하면서... 그러나 여전히 오른쪽 무릎은 산모의 얼굴처럼 퉁퉁 부어 있고, 침과 부항을 뜬 자리가 푸르죽죽하게 멍으로 남아 마치 무언의 데모를 .. 2009. 7. 15.
호숫가의 아침 호숫가의 아침 한 향 순 꿈결인 듯 낯선 소리에 눈이 떠졌다. 어느새 동이 텄는지 집안은 훤하게 밝았다. 화들짝 놀라 옆자리를 보니, 새벽잠이 없는 남편은 벌써 산책이라도 나간 모양이다. 눈을 비비며 커튼을 젖히고 나니 건너편의 숲과 호수가 기지개를 켜며 알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서야 비.. 2009. 7. 14.
호칭에 대하여 호칭에 대하여 한 향 순 약속시간에 늦을까봐 초조한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예상했던 것처럼 좌석버스 안은 만원이라 빈자리가 없었다. 비가 와서 우산과 핸드백에 오늘 전해줄 물건까지 들고 서있으려니 이리저리 중심을 못 잡고 차가 쏠리는 대로 몸이 기우뚱거린다. 이런 상태로 한 시간 이상을.. 2009. 7. 14.
자동응답 전화기 자동 응답 전화기 한 향순 아침부터 쏟아지는 비 때문에 외출할 일을 뒤로 미루고 집에서 보내던 하루였다. 밀렸던 일을 대충 끝내고 나서 모처럼 한가해진 시간에 친구들과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어 여기저기 다이얼을 돌려본다. 몇 군데나 부재중의 신호음만 울리더니 드디어 한 곳에서 전화를 받는.. 2009. 7. 14.
상식이 있는 사람 상식(常識)이 있는 사람 한 향 순 12월도 얼마 남지 않은, 세모(歲暮)를 눈앞에 둔 즈음이었다. 이맘때가 되면 늘 가슴이 허전하고 무언가 잃어버린 것처럼 허둥대며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속절없이 또 한해가 가고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의 휘둘림에 멍.. 2009. 7. 14.
내 몸을 들여다보며 내 몸을 들여다보며 모니터에 보이는 장면은 마치 커다란 동굴에 무언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꾸불꾸불한 동굴 안에는 물과 거품이 보이기도 하고 조그만 돌들도 보이는 것 같았다. 검사를 하느라 복부의 팽만감과 통증 때문에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나에게, 검사 요원은 모니터를 쳐다보라고 했.. 2009. 7. 13.